왜 빚을 지면 안 되는가? 빚지면 빛을 잃는 자본주의 삶의 그늘

오늘날 빚 권하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빚 없는 사람을 찾기란 핸드폰이 없는 사람을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가계부채 1300조원 시대, 빚의 양만큼이나 빚의 종류도 다양하다. 레버리지라는 말로 긍정적인 빚이라 불리는 학자금 융자나 전세대출, 내집마련주택담보대출, 사업 밑천이 되는 각종 융자금 등에서부터 알고 보면 빚이지만 마치 빚이 아닌 듯하게 보이는 신용카드 할부금이나 다달이 들어가는 각종 공과금과 통신비용들처럼 매달 우리 급여통장에서 강제적으로 빠져 나가는 비용들이 모두 다 빚이다.

 

오늘날 빚은 일상이고 생활이며 삶의 일부이다. 빚이 모든 일상 속에 너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고, 모든 사람들이 다 빚의 그늘 속에 살아가고 있기에 빚의 문제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빚은 우리들의 삶에 크고 작은 문제를 발생시키며, 미래의 가능성과 소득을 잠식시키는 작은 악마라 할 수 있다.




누구나 처음부터 빚을 짊어지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학자금이나 가족의 수술비, 긴급한 사업 운영자금 등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빚을 지는 삶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혹은 합리적인 소비라는 명분으로 포인트 축적과 할인 행사라는 미명 아래 신용카드를 남발하는 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IMF 이전에는 전세계 저축률 1~2위를 다투던 나라가, 가계부채 증가률 1~2위를 다투는 나라가 되어 버렸다. 이미 우리나라의 가계부채률은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가져온 부채율보다 더 높다.

 

그러나 아직도 사람들은 빚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그 빚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파괴해나가는지 제대로 인식하는 사람이 없는 듯하다. 이 글에서는 빚지지 않는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꼭 알고 있어야 할 빚이 우리 삶에 끼치는 좋지 못한 영향력에 대해 기술할까 한다.

 

 

1. 빚을 지면 시간이 우군이 아니라 적이 된다.

 

자본주의 사회는 한마디로 돈이 일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우리가 잠을 자고 있을 때도 돈은 일을 한다. 돈은 시간을 사용하여 이자라는 자식을 낳는다. 이자는 자본주의 삶을 가르는 단 하나의 변수이다. 어떤 사람은 저축과 투자를 통해 수익과 이자를 거두고, 어떤 사람들은 반대로 부채를 일으켜 이자를 갚는 삶을 살아간다.


 

이자 받는 삶은 자본주의의 주인 된 삶이라면, 이자주는 삶은 종과 노예된 삶이다. 그런데 항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자의 크기는 저축보다는 빚에 부과되는 쪽이 훨씬 크다. 제로 금리 혹은 마이너스금리에 준하는 바닥 저금리라고 하는 최근 경우에만 보더라도 은행 적금 금리는 2%도 안 되지만 빌리는 사람의 신용도에 따라 대출금리는 20%가 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아래서 빚을 진 사람은 저축한 사람에 비해 항상 큰 이자 비용을 짊어지고 살아가게 된다. 우리가 잠을 자는 동안에 어떤 사람들은 이자가 저축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고, 어떤 사람들은 빚이 눈덩이처럼 부피가 빵빵하게 커지게 된다. 곧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축하는 자에게 시간은 동업자이며 친구이지만, 빚진 자에게 있어 시간은 적이며 철천지 원수이다.

 

 

2. 빚을 지면 삶의 자유와 독립은 바로 물 건너간다.

 

자본주의에서 돈은 선택의 다양성과 삶의 독립성을 보장한다. 식당에 가서 메뉴판을 골라보자. 3000원을 가지고 있을 때와 50만원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와 수준의 차이를 느껴보자. 3000원을 가지고는 자신의 식성과는 별로도 김밥이나 라면 정도를 먹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50만원이 있다면 한식, 일식, 중국식, 양식, 분식 할 것 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모든 요리를 다 먹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자본주의에서 돈이 없는 사람들이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노동소득 외에 수입을 창출할 기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는 다양한 기회를 갖고 있다. 자본이 빛의 속도로 세계 국경을 넘나드는 이 시대에 부자들은 전세계에서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갖는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수입원천이 단 하나에 불과하다. 더구나 주주 자본주의 시대에서 기업들은 주주들인 부자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늘 단기적 실적주의에 따라 상시적 구조조정을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렇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의 유일한 수입원인 직업들은 언제나 폭풍 앞의 촛불처럼 언제나 흔들릴 수밖에 없다.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의 급여와 노동여건들은 항상 뒷걸음질 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수중에 돈이 많다면 보다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살 수 있다. 직업이 적성에 맞지 않다면 더 나은 직장을 찾기 위해 구직활동을 할 수 있고,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교육과정을 수강할 수 있고, 자신을 괴롭히는 못된 상사를 피해 돈은 더 적게 받더라도 좀 더 인간적인 직장을 구할 수 있다.

 

그러나 빚을 짊어지고 다달이 돌아오는 채무변제일을 지켜야 하는 빚쟁이의 삶을 살게 되면 그 모든 삶의 자유와 독립성이 사라진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자신의 적성과 자유를 무시한 채 직장생활을 하게 된다. 악독한 직장 상사의 신랄한 인격모독과 독특한 성격을 참아내야 하며, 자신이 꿈꿨던 미래를 향해 투자할 수 있는 모든 여력을 탕진하게 된다. 자신의 꿈과 계획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빚을 갚기 위한 목표에 따라 돈에 지배당하는 삶, 즉 빚의, 빚에 의한, 빚을 위한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직장의 무리한 요구사항과 직장상사의 험한 말을 들어도 혹 해고되어 다음 달 돌아오는 주택담보대출금을 갚지 못할까봐 모든 무리한 요구를 수용할 수 밖에 없고, 몸이 아파도 병가를 함부로 낼 수 없으며 법적으로 주어진 휴가도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

 

빚을 크게 지고 있는 어느 지인은 회사에서 업무상 팔이 부러지고 어깨가 탈골되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회사에 산재를 신청하지 못하고 병원에 입원하지도 못했다. 그냥 깁스를 한 채 회사일을 하고 있다. 혹 회사에 안 좋은 인상을 남겨 해고가 되면 앞으로도 수년간 갚아나가야 할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이 될까 두려워 남들이 볼 때 그렇게도 어리숙하게 살아가고 있다. 빚은 그처럼 사람을 쪼그라들게 하며 소극적이며 위축되게 한다.

 

 

3. 빚을 지면 곧 시지포스의 고통을 겪게 된다.

 

부자들의 삶은 마치 어린 시절 즐겨보았던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주인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하루가 지나면 거위는 황금알을 낳아준다. 거위가 살아있는 한 황금알이 주어지는 삶은 영원히 지속된다. 이것은 복리효과에 따라 자본주의 삶에서 이자를 받고 살아가는 부자들의 삶을 대변해 준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부자들이 투자한 다양한 금융상품과 인맥들을 뜻한다.

 

반면에 빚을 진 사람들은 시지포스의 무한반복적인 악몽에 빠져 살게 된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지포스의 신화를 아는가? 신의 분노를 사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포스의 비극을 말이다. 시지포스는 모든 힘을 다해 산꼭대기로 바위를 올려놓으면 그 바위는 시계추처럼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시지포스는 다시 원점에서부터 바위를 들어 올려야 하는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해야 한다. 시지포스의 노동은 영원히 무한반복 되는 고통의 삶을 뜻한다.


 

빚을 지면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고통과 바닥을 알 수 없는 무저갱에 추락하는 고통을 겪게 된다. 빚을 진 삶은 수렁에 빠진 삶과 같아서 끝없이 추락하기만 한다. 끝과 바닥을 알 수 있다면 그토록 고통스럽지 않겠지만 그 끝을 알 수 없기에 그 고통은 더욱 힘이 들게 된다. 고통의 끝없는 무한반복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터널링 효과가 바로 빚의 저주이다.

 

빚을 진 사람들은 말한다. 갚아도 갚아도 빚은 당최 줄지 않는다고. 애초에 진 원금은 얼마되지 않지만 원금은 새끼를 낳고 또 낳는 무한생식 과정을 통해 눈덩이처럼 증가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언제나 노동소득증가분보다 자산소득증가분이 높기 마련이기에 빚과의 경쟁은 해보나마나 승패가 뻔한 경주이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직장인들에게 월급날은 두둑한 월급봉투와 간식이 난무하는 화려한 축제의 날이기보단 각종 할부금과 대출금, 신용카드 빚으로 돈이 빠져 나가 결국 제로베이스로 수렴하는 통곡의 날이다. 돈은 들어오자마자 빛의 속도로 스치듯 은행과 통신사와 대출업체로 빠져 나간다.

  

 

4. 빚진 삶은 결국 행복한 삶과는 굿바이다.

 

빚을 짊어지게 되면 삶의 질이 형편없이 추락하고 만다. 빚을 진 순간 행복한 삶과는 영영 이별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행복과 만족감은 가처분소득과 관련이 많다. 가처분소득이란 자신이 얻은 소득 중에서 각종 필수불가결한 경비를 제외한 실제 소비와 저축에 사용 가능한 소득이다. 구체적으로 은행대출금과 자녀학자금, 공과금과 통신비 등 고정비를 제외한 소득이다.

 

우리들의 행복감이 가처분소득과 관련이 깊은 이유는 우리가 행복감을 얻는 취미생활과 문화생활이 가처분소득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연극 영화 감상이나 여행, 사진 동호회 활동이나 사교 친목 활동은 많은 가처분소득의 뒷받침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빚을 많이 지게 되면 가처분 소득이 줄어들다 못해 나중엔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빚을 많이 진 사람들은 원금과 이자를 제때 상환하지 못하면 결국 가처분 소득을 줄여야 하는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다. 문화비와 사교비, 식비는 빚진 사람들이 가장 먼저 줄이는 부분이다. 자신의 지출 중에서 대출금과 생필품 비용이 증가되어 앵겔지수가 높아지면 삶의 만족도와 행복도는 철저히 하락하고 만다.

 

채무자는 처음에는 원하고 바라는 것(want)을 포기하다가 필요한 것(need)마저 줄이고, 결국 생존(survival)에 필요한 것 외에는 모두 줄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살기 위해 빚을 진 것인지 빚을 갚기 위해 살아가는 지 도저히 분간이 되지 않는 삶을 살게 된다.

 

과중한 빚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랑도 사치, 예술도 사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학자금 융자로 허덕이는 젊은이들에게 연애나 결혼은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오는 남의 얘기일 뿐이다. 사교육비와 주택자금융자로 허리가 휘어지는 중년들에게 외식이나 가족여행 또한 사치일 뿐이다. 자영업 대출과 자녀 결혼 대출, 병원비 목돈 대출로 삶에 조금도 여유가 없는 노년층들에게 칠순잔치나 전원생활 역시 그림의 떡일 뿐이다.

 

한번뿐인 인생, 그러나 빚은 삶을 메마르고 팍팍하게 만든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빚은 인간이 인간이 되지 못하게 하고, 나 자신을 나 자신이 못되게 한다. 그냥 빚 갚기 위해 일하는 것이 전부인 돈 버는 기계이자 일만 아는 로버트가 되게 만들어 버린다.

 

그래도 빚을 지겠는가? 자신이 스스로 주인이 되는 주체적인 삶, 쫓기지 않는 여유로운 삶, 사소한 금융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로운 삶을 꿈꾼다면 절대 빚지지 말라. 빚을 지는 순간 당신의 삶은 당신의 삶이 아니라 돈의 노예가 되는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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