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후반전의 시작, 노전정리

노전정리란 무엇일까? 우리나라 대부분 사람들에게 이 용어는 생소한 용어일 것이다. 먼저 노후라는 말은 들어봤으나, ‘노전이란 말은 접해 볼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인생의 후반전 즈음에 시작하는 정리법에 대해서는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노전정리(老前整理)늙기 전에 시작하는 정리법을 의미한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단샤리 열풍의 진원지 일본에서 오랫동안 고령자와 장애우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생활 속에서 물리적 제도적 장벽을 없애는 베리어 프리실천 운동에 종사해온 생활환경 디자이너 출신 작가 사사오카 요코가 만들어 낸 용어이다.


 

노전정리란?


노전정리란 퇴직이나 자식의 독립과 같은 인생의 큰 전환기에 몸과 마음을 포함하여 생활 주변을 정리하는 것이다. 치매나 암 등 몸과 정신을 가누지 못하는 질병이 찾아오기 전에 자기 삶의 헝크러진 부분과 어지러운 부분을 정리하여 삶의 후반전을 가장 의미 있는 부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삶의 방향을 재조정 하는 정리법을 의미한다.

 

따지고 보면 노전정리는 서구적 물질주의에 대한 반성으로 등장한 삶의 간소화운동인 미니멀리즘의 연장선에 있다. 필요한 것 외에는 모든 것을 정리함으로써 삶의 여백을 확보하여 더 늦기 전에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하는 삶의 전략이다.

 

그런데 노전정리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품정리생전정리와 어떻게 다른지 비교할 필요가 있다. 유품정리란 자신이 세상을 떠난 후 남은 가족들이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을 말하고, 생전정리란 세상에 남겨질 가족들을 위해 당사자 본인이 생전에 상속과 보험 등을 포함해 신변을 정리하는 것을 말한다.

 

그에 비해 노전정리란 생전정리를 시작하기 훨씬 전부터 인생의 후반전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 삶을 최적화 하는 정리법이다. 따라서 시간 순서적으로 노전정리 생전정리 유품정리 순으로 정리 하게 된다고 볼 수 있다.



 

노전정리는 왜 필요한가?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 노전정리

 

그렇다면, 삶에 있어 노전정리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인가? 먼저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이다. 인생의 후반전은 전반전과 상황이 많이 다르기 때문에 젊었을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다가는 큰 실패와 좌절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실패해도 회복할 기력과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에 보다 명확한 사고와 방향성이 필요하다.

 

그런데 전 직장에서 퇴직한 후 많은 사람들이 과거의 성공 경험과 명함에 묶여 새로운 인생을 제대로 설계하지 못하고 있다.

 

어떤 노신사는 퇴직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직장 생활 시절 입었던 정장들을 아직도 처리하지 못하고 있다. 언젠가는 그때와 비슷한 직장에 들어갈 수 있으리라 믿는 마음과 아직도 자신은 팔팔하다는 마음, 그리고 화려한 과거에 대한 미련 때문에 섣불리 정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연연할수록 현재의 아까운 시간은 무의미하게 지나간다. 의복은 그때그때 때에 맞는 옷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다. 체중이 크게 불은 중년 여성이 과거 처녀 시절 즐겨 입었던 미니스커트를 입고 강남역 앞을 걸어다닌다면 어느 누구도 그 모습을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처럼 퇴직후 남성들에게는 보다 편안하고 따뜻한 캐주얼한 복장이 칼 주름과 각이 잡힌 정장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과거의 정장은 지인 결혼식이나 장례식 참석용이 아닌 이상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처럼 과거와는 다른 삶이 시작되는 인생의 전환기에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옛 생활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노전정리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인생 최후의 가족들에 대한 배려, 노전정리

 

두 번째로 가족들을 위해서도 노전정리는 필요하다. 본인이 자신의 물품들을 생전에 제대로 정리해 놓지 않으면 남은 가족들이 그 유품들을 정리하느라 큰 고통을 겪게 된다. 생전에 제대로 유언장이나 상속 문제를 마무리 지어 놓지 않으면 자식들이 장례식장에서 서로 원수가 되는 일이 생기기도 하고, 죽기 전에 본인의 짐을 제대로 처리해 놓지 않으면 남은 가족들이 몇 톤씩 되는 유품을 정리하느라 큰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유품정리는 단순히 체력적으로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려서 힘든 것이 아니다. 부모나 가족들이 남긴 물건들을 하나하나 볼 때 마다 자식들의 마음은 큰 고통을 겪게 된다. 장례식을 치른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가족을 잃은 상실감과 고인의 생전에 제대로 해주지 못했던 후회와 자책감 밀려와 유품을 정리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다. 부모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마련한 물건들을 자신들이 함부로 처리하는 데 대한 죄책감도 유품정리를 어렵게 한다.

 

따라서 남은 가족들의 안위와 자식들의 심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의미에서라도 살아있는 동안 틈틈이 노전정리를 해두는 것은 인생 후반전 운영의 유용한 팁이다.



 

인생 후반전, 삶의 질적 향상을 위한 준비, 노전정리

 

그리고 삶의 편리를 위해서도 노전정리는 필요하다. 정리라는 것도 때가 있다. 정리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고도의 집중력과 판단력이 필요한 작업이다. 기력과 체력, 정확한 판단력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정리 작업을 손쉽게 시작할 수가 없다.

 


일본의 경우, 노전정리의 필요성을 느껴 본격적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하는 나이가 여성은 60, 남성은 70~80대 이후라고 한다. 그런데, 노전정리는 늦게 시작할수록 어려운 작업이라 한다.

 

우선 나이가 들면 무릎과 허리 관절과 근육량이 감소되어 물건을 들고 책장을 옮기는 등의 작업을 할 수 없다. 또한 자신의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냉철한 판단력이 흐려져 버릴 것과 남길 것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이 감퇴되며, 과거에 대한 미련과 오랫동안 함께 했던 물건들에 대한 애착이 강해져 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나이가 들수록 물건을 정리하는 것과 자신의 죽음을 동일시하는 심리적 경향이 강해진다고 한다. 노인들에게는 주변을 정리하라고 하면 마치 죽음을 준비하라는 느낌을 받아 자신의 삶의 주변을 정리하는 것을 멀리하게 된다.

 

일본은 오래전부터 주택 계량 사업을 통해 휠체어 사용과 노인들의 이동 편리를 위해 집안의 계단과 문턱을 없애는 대대적인 정비사업을 벌였다. 그래서 지금은 왠만한 가정들은 노인들과 장애인들도 불편 없이 집안에서 움직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계단이나 문턱, 집안의 건축학적 부분이 문제가 아니라 집안 가득 쌓여있는 정리 안된 물건들이 노인들의 움직임과 이동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관절염을 앓고 있거나 골다공증으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노인들과 정확한 판단력을 상실한 치매 증상을 앓고 있는 노인들이 물건들을 방바닥에 방치하여 물건에 걸려 넘어지거나, 쌓여 있는 물건에 갇혀 옴싹달싹 하지 못하는 현상들이 많아진 것이다.

 

따라서 노전정리란 몸에 물건을 들 수 있고, 가구를 옮길 수 있는 체력과 기력이 있고, 물건을 정리할 건강한 판단력이 있을 때 시작해야 한다.



 

떠나간 자리에 여운을 남기는

아름다운 종점을 위한 투자, 노전정리

 

그러나 무엇보다 인생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서 노전정리는 필요하다. 인생의 후반전에는 전반전만큼 안정적인 고수익을 확보할 수 없다. 그리고 자녀들이 독립했기 때문에 그렇게 넓은 공간이 필요하지도 않다. 그리고 자신의 몸이 예전 같지 않다. 곧 많은 돈이 들어가는 장기 입원이 필요할 수도 있고, 집을 떠나 요양원 생활을 할 수도 있으며, 건강을 위해 전원주택이나 귀농생활을 선택할 수도 있다.

 


병원이나 요양시설에는 기껏 캐비넷 한 켠 정도 밖에 소유물이 허용되지 않는다. 값비싼 실버타운 생활 역시 개인의 사적 공간은 세 평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한 공간에서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소유물을 줄이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인생의 후반전에는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아껴 써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지금 가지고 있는 것들을 최대한 잘 이용하고 헛된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해선 안된다. 인생의 후반전을 앞두고 노전정리라는 대대적인 재고조사와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노전정리 중 반드시 필요한 부분

 

노전정리는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다. 앞으로 삶의 비전, 앞으로 어떤 삶을 살 것인가 하는 명확한 삶의 방향성 정립이 중요하다. 자신의 삶의 전개도에 따라 어떤 물건을 버릴지 어떤 물건을 남길지가 결정된다.

 

그리고 노전정리에 있어 배우자와의 소통이 중요하다. 대체적으로 여성은 버리려고 하고, 남성은 오래 간직하려는 경향이 있어 늘 티격태격 싸움을 하기 쉽다. 그러나 중년 이전과 다르게 단 둘이 오랜 기간을 함께해야 하는 노부부에게 있어 삶을 공유하는 공간의 물건 배치와 물건 개수는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특히 남성들은 노전정리가 필요한 부분이 매우 크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보다 노전정리가 힘에 부치는 것이 사실이다. 삶의 중심무대가 옮겨졌기 때문이다. 회사 중심에서 가정 중심으로 일 중심에서 관계 중심으로 이동을 해야 한다. 관계 역시도 직장과 연관 된 관계 중심에서 아내를 비롯한 가족 중심으로 변화해야 한다.

 

예전에는 회사에서 거래처나 직장 선후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양복 바지와 와이셔츠에 구김없는 다림질을 아내에게 요구했다면, 이젠 다리미를 들기 힘들어진 아내의 건강을 생각해서 구김이 가도 좋은 등산셔츠를 즐겨 입는 삶의 패턴을 선택해야 한다. 예전에는 회사의 인맥 관리를 위해 주말 골프를 즐겼다면 이젠 아내가 힘들어 하는 쇼핑을 도와주기 위해 카트를 밀어주는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이것이 힘들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된다. 평균 수명이 짧은 남성은 아내를 남기고 세상을 먼저 떠나 여성이 이 땅에 홀로 된 몸으로 오랜 기간 남겨지게 할 수 있고, 떠나기전 오랜 기간 동안 아내에게 병수발의 힘든 짐을 짊어지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남자들만의 디렉토리 물건들은 일찌감치 정리해 놓아야 한다. 일명 남자만의 민감한 폴더 내에 들어 있는 동영상과 화보들은 다 정리해야 한다. 나중에 제대로 정리하지 못해 자식과 아내가 그것들을 처리해야 한다면 인생 말년에 체면을 구기는 사건이 될 수 있다.

 

여성들은 남편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나온 남편의 전여친 러브레터 한 장만 가지고도 남편에 대한 기존의 애정이 식어버린다고 말한다. 하물며 남자들만의 동영상과 화보집들은 여성들의 마음에 앙금을 남기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소해 보이지만 매우 중대한 일이다.

 

그리고 만약 값비싼 소장품과 물건을 남긴다면 그 물건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서류들과 자료들을 정리하여 가족들이 찾아보기 쉽게 남겨놓도록 하자. 매우 귀한 예술품과 고가의 애장품들이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 당사자 사후 헐값에 넘어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노전정리 하기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

 

그렇다면 사람들이 정리를 할 때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은 어떤 부분일까? 남성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부분은 과거 직장생활과 연관된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다. 대부분 남성들은 퇴직 후에도 좀 더 일할 수 있어”, “난 아직 죽지 않았어.” “충분히 더 잘할 수 있어하는 마음으로 일과 관련된 물건들을 버리지 못한다.

 

직장인의 유니폼인 감색 정장을 20년이 지나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화려한 경력을 보여주는 서류 뭉치들을 오랫동안 상자에 고이 모셔두기도 한다.

 


가장 첨예하게 남녀가 대립하는 부분은 책이다. 남성들은 책에 대한 미련이 많아 쉽게 정리하지 못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사사오카 요코의 충고가 중요한 참고가 될 것 같다.

 

사사오카 요코 역시 책을 버리는 문제는 인생의 숙제였다고 한다. 책장 가득 꽂힌 책은 책장을 넘어 방안의 벽과 화장실 빈 공간까지 차지하게 된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자신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 역시 깨닫게 되었다. 사사오카 요코는 책장 가득 쌓여 있던 책들을 주변에 나눠주고 도서관에 기증을 하게 된다. 그는 말한다.

 

인생에서 주어진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옛날에 읽었던 책보다는 새 책을 한 권이라도 더 보고 싶다.” 

 

이 글을 공유하기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