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식 상팔자시대 개막, 자식들을 독립군의 후예로 무장시켜라

우리나라 중장년층들은 저축할 돈이 전혀 없다고들 한다. 늘어난 수명으로 소득단절 구간이 훨씬 길어져 저축과 투자가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한 시기라는 것에는 모두 다 공감하지만 어디를 돌아봐도 내일을 위해 저축할 여력은 보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동안 안 먹고 안 입고 밤 잠 아껴가며 모은 돈들은 다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자식들 수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교육열과 자식 사랑은 세계 제1의 수준이다. 맹모삼천지교의 맹자의 어머니도 8학군 입성을 위해 수십번 이사를 감행한 강남 아줌마들의 교육열에는 미치지 못한다.

 

우리나라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너무 지나친 감이 있다. 고위 공무원 인사청문회에서 위장전입과 입시비리는 단골 메뉴이고 어느 대통령 후보는 자식의 군 입대 비리 문제로 선거에서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청렴결백한 공무원과 대쪽 이미지 대권 주자들도 자식 문제 앞에선 떳떳할 수만 없는 것이 대한민국 부모들의 실상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신의 노후자금을 자식들의 교육비로 다 털어넣고 있다. 새로운 정권이 창출될 때마다 사교육비 근절을 외쳐대고 있지만 어느 정권도 사교육비 증가 추세를 막지 못하고 있다. 내 자식만큼은 누구보다 더 가르쳐야겠다는 부모들의 열정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교육비는 한 번 투입되면 쉽게 줄일 수 없는 고정비적 성격이 강한 비용이다. 무엇보다 학벌 중시 사회에서 자식의 인생이 걸려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성질의 돈이다. 더구나 자기만 그런 것도 아니고 자식 있는 대한민국 부모들 모두 자신의 노후를 담보로 자식의 미래에 투자하고 있으니 자신만 그 대열에서 빠진다는 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식 리스크, 베이비붐세대들이 겪는 글로벌 현상

 

그러나 부모들도 이젠 자신의 미래를 철저히 계산해 보아야 한다. 예전처럼 소 팔고 논 팔아 자식의 대학 등록금을 마련해 주고 그 아들이 출세하여 늙은 부모와 동생들의 뒤를 봐줄 수 있는 사회라면 지금처럼 교육에 올인하는 전략도 결코 나쁜 전략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해도 너무 변했다. 지금의 중장년층은 샌드위치 세대로 부모님의 간병과 자식에 대한 부양의 의무를 수행하고도 자신의 미래는 자식들에게 더 이상 의존할 수 없는 첫 세대이다.

 

산업역군이셨던 부모 세대들은 변변한 연금도 보험도 들어 놓으신 것이 없어서 생애 마지막 구간에 질병 치료로 많은 돈이 필요한 세대이다.

 

지금 자녀 세대들은 어린 시절부터 막대한 양육비와 사교육비를 들여 성장시켜 놓았지만 천문학적 대학 등록금과 어학연수비를 대주고도 취업을 못해 집에서 용돈을 타 쓰는 니트족들이 많다. 용케 취업에 성공해 제 앞가림 잘 하는 자식들도 결혼을 앞두고는 전세 자금 마련을 위해 부모들의 마지막 노후 자금을 다 털어 가기는 마찬가지이다.

 

갖고 있는 집 한 채 외에 별다른 재산이 없는 노부부가 주택연금이라도 들라고 하면 집을 상속 받기 원하는 자녀 눈치를 봐야 하고, 홀로 사는 부모가 새로운 짝을 만나 재가를 하려고 해도 유산 상속 문제로 자식들이 반대하여 만년의 고독을 면해 보려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기도 한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정상적인 범주 안에 있는 예였다면 더 심한 경우도 많다.

 

어떤 자녀는 부모가 마지막 노후 자금으로 남겨 둔 돈을 사업 자금 명목으로 빌려가 결국 도산하여 부모들을 빈털털이로 만들기도 하고, 사채 빚에 쫓겨 온 가족을 데리고 노인 부부가 단촐하게 살고 있는 집에 들어와 가난한 노부부들의 소박한 밥상에 수저를 얹기도 한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후유증과 잃어버린 20년의 디플레이션을 겪고 있는 선진국인 일본과 미국의 베이비붐 세대들도 자녀 문제에 있어서는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다.

 

신용불량자가 된 자식들이 부모집에 돌아와 부모의 연금을 나눠 쓰는 일본 캥거루족들이나 이혼과 파산으로 갈 곳 없는 자식들이 부모의 품으로 다시 귀환 하는 일로 몸살을 앓고 있는 미국 베이비부머들의 사례들은 결코 특수한 몇몇의 이야기들이 아니다.

 

노인 담당 사회복지사들은 가난한 노인들의 경우 차라리 자식은 없는 이만 못하다고 입을 모은다. 원래부터 자식이 없는 무연고 노인의 경우에는 국가 지원 요양시설과 정부 지원금을 받을 수 있어 최소한의 생계를 세우는 데는 이상이 없다.

 

그러나 자식이 있는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 본인은 경제적으로 극빈 상황에 처해 있으나 주민등록상 자식이 존재하고 자식이 일정한 소득이 있을 경우에는 자식과 전혀 연락을 하지 않는 사이라도 전혀 국가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진정 무자식 상팔자라는 것이 오늘날 세태인 것이다.

 

더구나 초고령화 사회에서 살게 될 자녀 세대들은 저성장 디플레이션 시대의 불안정한 경제로부터 오는 고통과 4차 산업 발달에 따른 일자리 불안과 노령세대 부양을 위한 세금 증가로 허리가 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자기 앞 가림도 하기 어려운 자녀 세대들에게 본인의 미래에 대한 부양 책임을 지게 만드는 것은 결코 어느 부모들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100세 시대에 맞는 부모와 자식 간의 새로운 관계를 재정립하라!

 

따라서 이제 부모들도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나라보다 더 잘 살고 사회복지 제도도 잘 갖춰진 선진국 부모들도 자식들에게는 지나치게 투자하지 않는다. 매달마다 연금이 지급되어 우리나라 부모들보다 미래가 더 안전한 선진국 부모들이 더 경제적 여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 더 이상 투자하지 않는 이유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들이라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식에 대한 부모로서 역할에 대한 철학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남보다 더 잘 살거나 최소한 남에게 뒤지지 않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선진국 부모들은 자녀들이 사회에서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부모 역할에 대한 철학의 차별성이 부모들의 노후 준비에 대한 극단적 차이를 가져오게 한 것이다.

 

우리나라 부모들은 기준이 남에게 있다. 남보다 더 잘 살 거나 최소한 남에게 뒤지지 않아야 한다는 기준을 갖고 있기에 남이 사립 유치원에 보낸다면 내 자식은 외국인 유치원에 보내야 하고, 남이 Y대에 보낸다면 내 자식은 S대에 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형편이 아무리 어려워도 남들이 자식을 위해 2억짜리 전세 아파트를 구해 주었으면 자신도 빚을 내서라도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부모들은 남 하는 만큼 해주느라 등골이 휘는 것이다.

 

그에 비해 선진국 부모들은 자식이 독립된 성인으로 사회에서 자립해 나갈 수 있도록 기본적인 도움을 주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리고 부모 자신의 삶 역시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자식을 돕는 데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선을 긋는다.

 

자식의 삶에 대해 요람에서 무덤까지 남만큼 살 수 있도록 무한책임을 지는 것이 우리나라 부모들의 책임감이라면 선진국 부모들은 경제적 주체로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 성인이 될 때까지 자식을 돌봐주고 일정한 기간이 되면 떠나보내는 것이 부모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기서 어느 사회가 더 인간적이고 더 비인간적이냐 혹은 어디가 부모 자식 간의 정이 더 많고 적으냐 따지기 전에 100세 시대 도래에 따라 어느 사회가 100세까지 구성원들이 생존가능할 수 있는 사회가 되겠는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우리나라 부모처럼 살아서 정말 100세까지 경제적으로 생존할 수 있겠는가?

 

 

자식들을 일찌감치 경제 독립군의 후예로 자립시켜라!

 

선진국 부모들과 한국 부모들이 자식에 대한 구체적인 책임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일본, 미국, 독일을 비롯한 선진 고령화 국가 부모들과 한국의 부모들의 차이는 세 가지 면에서 크게 다르다.

 

첫째 선진국 부모들은 공교육 수준까지 교육비를 투자한다. 집안의 가처분 소득을 모두 빨아들이는 진공청소기 같은 한국 가정의 사교육비는 100세 시대에 맞지 않다.

 

대학 등록금 역시 부모만의 책임이 아니다. 선진국에선 국가의 지원과 다양한 장학금과 학생들의 자발적 아르바이트와 학자금 융자 등으로 등록금을 해결한다.

 

우리나라에선 부모가 대학 등록금을 전액 책임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분은 사회 전체가 좀 더 과감한 투자가 있어야 하는 부분이다. 일단 대학 등록금이 너무 비싸고 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시급이 너무 저렴하다.

 

학자금 융자 일변도의 정부 지원 역시 극히 잘못되어 있는 정책이다. 지금 같은 제도 속에서는 학생들이 대학을 다니며 빚에 대한 짖눌림으로 제대로 된 학창생활을 할 수 없고 공부에 몰입할 수도 없다. 졸업한 동시에 많은 학자금을 갚아나가느라 자신에게 맞는 직장을 구할 수 없고, 직장에 들어가서도 오랜 기간을 부모의 도움 없이는 빚 상환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회 전체가 학생들을 미래의 산업 역군으로 생각하여 투자하고 아껴주어야 한다. 적성과 소질을 살려내어 창의적인 인재로 길러내야 한다. 이것은 고령화 사회가 대두되어 생산성과 고부가가치 능력을 길러내지 않으면 국가 전체의 성장률이 떨어지고 앞으로 지속적인 국가 경제의 추락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선진국에선 결혼식 비용은 자식 세대가 부담한다. 선진국 젊은이들은 가까운 지인들을 모아 조촐한 결혼식을 올린다. 이것은 허례허식을 거부하고 실질을 숭상하는 그들의 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화려한 결혼식을 꿈꾸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나 다 같다. 그러나 돈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보다 훨씬 잘 사는 국가들도 다 이렇게 산다.

 

한국의 결혼식은 부모들의 사회적 능력과 가문의 재력을 뽐내는 호화로운 무대와 같다. 그러나 한번의 결혼식이 중요한가 평생의 결혼생활이 중요한가? 지금의 결혼식 규모는 은퇴를 얼마 남겨두지 않아 노후자금을 확보해야 하는 부모세대들과 불안정한 직업 소득으로 집 장만과 앞으로 자식 출산을 앞둔 자식 세대들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규모이다.

 

때로는 그 옛날 정화수 한 잔을 떠놓고 혼례식을 치루던 갑순이와 갑돌이의 결혼처럼 결혼예식을 생략할 생각도 해야 한다. 본질에 충실하자. 결혼식과 결혼하는 건가? 배우자와 결혼하는 건가?

 

셋째, 선진국에선 결혼해서 살 집에 대해서도 부모들이 모든 것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선 결혼해서 자녀들이 살 집이 은퇴 부모들의 마지막 노후자금을 다 털어가는 장본인이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결혼한 부부들이 하나하나 장만해 가기 시작한다.

 

물론 우리나라 전세와 집세는 너무 비싸다. 실생활 목적이 아닌 투자 목적의 투기와 통계적 조작과 호가 중심의 거래가로 왜곡되고 기형적으로 형성된 아파트 시장은 한 가족의 삶의 보금자리를 평생에 걸친 노동을 통해서도 장만할 수 없을 정도로 높여놓았다.

 

부모들로서는 애지중지하게 키운 자식들이 어렵게 결혼생활을 시작하는 것을 결코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 사회가 얼마나 결혼과 출산을 감당하기에 벅찬 사회인지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 세대들은 앞으로도 소득을 벌어들이는 세대들이다. 기술과 경력이 쌓임에 따라 연봉도 높아지고 집도 넓혀갈 수 있을 것이다. 월세부터 시작하여 알뜰하게 모아 자기 집을 장만해 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세대 본인들의 미래는 어떠한가? 지금 모아 둔 돈도 없는데 앞으로 벌어들일 소득도 없다. 그런데 앞으로 살아갈 길은 40년 이상 남았다. 언젠가 지금 있는 돈도 바닥이 날 텐데 그 때 자식들에게 손을 벌릴 수 있겠는가? 차라리 지금 전세 아파트를 마련해 주는 것을 거절하고 그 일부를 도와주는 선에서 마감 짓고, 미래에 자식에게 의지하지 않는 부모세대가 되는 것이 더 떳떳하지 않겠는가?

 

 

100세 시대, 부모와 자식들의 장기적이며 따뜻한 관계는 서로에게 지나친 부담이 되지 않는 독립적인 인격체들 간의 만남이어야 한다.

 

부모세대들이여, 먼저 자식들에 대한 지나친 책임감로부터 독립하자. 그리고 자녀들을 독립군의 후예로 자립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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