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혼, 평생의 친구를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작년 가을, 나의 시선을 고정시킨 한 편의 드라마가 있었다. 이상윤과 김하늘 주연의 <공항 가는 길>이었다. 이 드라마는 결혼하여 버젓이 아이가 있는 두 남녀가 새롭게 만나 사랑을 키워가다 결국 기존의 남편과 아내와는 이혼을 하고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 관계를 키워간다는 새 만남과 새 출발을 담고 있는 드라마였다.

 

세상이 무너져도 가정은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시선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사방이 뚫려 있는 인천공항과 호주의 바다, 제주도의 성산봉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스튜어디스 출신의 여성과 건축설계사 출신 남성의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는 사랑은 한편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공항은 누군가는 떠나고 또 누군가는 돌아오는 곳이며, 만남과 이별의 교차점이자 개인으로선 이전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공간이었다. 이혼과 재혼이라는 관계를 또 이렇게 아름답게 담을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고나 할까?

 

드라마 <공항 가는 길> 보다 꼭 20년 전에 또 이혼을 아름답게 묘사한 드라마가 있었다. 황신혜와 유동근이 주연으로 나온 MBC<애인>이다. 이 드라마의 별명이 아름다운 불륜이라고 부를 정도로 당시에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이었고, 이 때부터 서서히 우리 사회도 중년 남녀의 사랑을 불륜이나 이혼이라는 제도적 잣대가 아닌 남녀의 사랑이라는 측면으로 보기 시작한 것 같다.

 

사실 사랑이란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인데, 사회의 변화를 보여주는 드라마를 보면서 우리가 깨진 가정의 주인공의 입장에서 드라마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이혼도 불사하는 주인공의 입장에서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다는 점을 느끼며 우리나라도 많이 변했다는 점을 느꼈다.


 

드라마 <애인>이 등장한 후 1년 후에 일본에는 <나리타 이혼>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됐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부부가 나리타공항에서 이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드라마였다. 우리나라의 제주공항도 비슷한 별명을 얻었었지만 일본의 인천공항과 같은 나리타공항은 신혼여행 후 이혼을 선포하는 일본 젊은이들의 이혼의 본산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리타 이혼이라는 것이 젊은 신혼부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노년에 이른 장년 부부들의 황혼이혼의 중심지로서 일본 이혼문화유산의 1호점이 된 것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나리타 이혼하면 노부부가 막내아들 결혼식을 치루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것을 확인한 후 나리타공항에서 바로 이혼 도장을 찍는다고 해서 나리타 이혼이란 말이 생겼다고 한다.

 

아직 인천공항 이혼이란 말은 생겨나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황혼이혼 증가율은 매우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최근 미국 뉴욕타임즈는 50세가 넘은 부부의 이혼이 1990년도에 비해 두 배 증가했다며 미국 사회의 황혼이혼 증가율을 걱정하였다.

 

그런데 우리나라 실정을 보자. 19902,363건에 불과했던 황혼이혼은 2015년 사법연감에 따르면 2014년 기준 33,140건으로 증가했다. 미국은 2배이지만 우리나라는 14배가 더 증가했다. 2012년부터는 결혼 4년 이내 갈라서는 신혼이혼을 추월하여 결혼 기간별 이혼순위에서 꾸준히 1위를 유지해 오고 있다.

 

무엇이 우리 가정을 <애인>이나 <공항 가는 길>처럼 이혼 드라마의 현장으로 만들었을까? 왜 그토록 오랜 기간을 함께 해온 분들이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리는 걸까?

 

 

우선 남성과 여성의 사회 변화에 대한 인식 차이다. 여성은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개인주의적 삶의 가치를 내재화했다. 부창부수로서 삼종지도를 따르는 옛 여성의 모습은 이젠 찾아볼 수 없다. 스스로 행복을 선택하고, 관계를 결정지을 수 있는 주체적 존재로 거듭난 것이다.

 

그에 비해 남성의 시각은 가부장적 가치관 아래 있다. 아버지는 가장이며 집의 대표자이고, 집안의 대소사의 최종 결정권자이며, 한 가정의 권위이며 울타리이고 높은 책임감과 함께 존경과 존중을 받아야 할 집안의 기둥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사실 남자가 직장생활을 하면서 바깥일을 책임지며, 여성이 집안일을 하며 자녀양육을 책임지고 있을 때 즉 남성이 생산의 주체이자 여성이 소비의 주체로서 가정의 역할을 효율적으로 나눠 활동했을 때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남성이 정년을 맞아 집으로 돌아오면서 가정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면서 가정의 주도권을 두고 여러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두번째는 남성의 퇴직 시기가 공교롭게도 부부들이 사회적 자아의 혼란을 겪는 시기라는 점이다. 남성의 퇴직 시기를 즈음하여 자녀들의 분가로 가정의 역학 관계가 달라진다. 그리고 남성은 그동안 자신의 의미를 규정해 주었던 직장을 상실했고, 여성은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었던 자식을 떠나보내게 된다. 큰 상실의 시대인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상실감으로 큰 감정의 동요를 겪고 있는 시기이다.

  

세번째 여기에 갱년기의 위기에 직면한 노부부들은 생리적인 호르몬의 역전 현상이 나타난다. 여자는 남성 호르몬이, 남성은 여성 호르몬이 예전에 비해 더 많이 분비되게 된다. 남성은 여성 호르몬의 영향으로 내성적으로 변하고 자꾸 안에 틀어박혀 있고자 한다. 그에 비해 여성은 다른 여성들과 무리를 짓고 밖에 나가 활발한 활동을 하기 원한다.

 

어르신들이 많이 모여 있는 노인정을 가보면 호르몬의 작용을 단번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남성 노인정은 조용한 가운데 낮잠을 자는 할아버지 몇 분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라면, 여성 노인정은 다양한 활동과 이야기 꽃이 피어나는 활기 넘치는 여성 노인들의 생명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남편이 퇴직하여 집으로 돌아오게 되면, 일단 조용히 쉬며 그동안 못다했던 가족들과의 아기자기한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반면, 여성은 보다 활발한 사회적 관계를 가지며 자녀 없는 공허한 마음을 대신 채우고자 하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면 남성은 가부장적 권위를 앞세워 여성을 통제하게 되고 여성에게 더 가정적으로 충실해 질 것을 요구하며 가정 일에 잔소리를 하게 된다. 그렇다고 집안 허드렛일을 몸소 실천하며 가사 노동을 분담하는 것도 아니다. 종일 집에 붙어 있으면서 TV를 보다가 차려준 밥상을 비우는 것이 하루의 일과이다.

 

처음에는 그동안 가족 부양을 위해 헌신해온 남성의 가족 공헌도를 인정해서 남편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종일 빈둥거리는 남편 식사 준비와 설거지 심부름을 하다보면 하루가 전부 다 가버려 자녀가 떠난 후 삶의 새로운 의미를 찾아 마음을 추스르고자 하는 마음을 채우지 못한다.


남편은 일상의 모든 일에 서투르기에 여성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다. 그리고 퇴직전 관리자의 고압적인 자세로 아내에게 지시하는 것 또한 많다. 여성으로서는 하루 세 끼 집에서 먹는 삼식이와 24시간 젖은 낙엽처럼 온 종일에 따라다니며 잔소리 하는 남편 때문에 몹시 마음이 상하게 된다. 새로운 시집살이인 남편살이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회사를 나갈 때 늘 단정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런닝에 파자마 차림으로 늘 부스스하고 지저분하며 게을러진 남편을 보며 한숨만 나오게 된다.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해 여자로서의 삶을 다 바쳤구나. 이제는 폐경이 되어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는데, 이런 남자 때문에 내 삶은 없었구나하며 후회하는 나날이 늘어난다.

 

지금은 입장이 달라졌지만, 현 퇴직세대인 베이비붐 세대만 해도 남자의 지위가 여자의 지위를 결정했다. 남편이 부장이면 여자는 부장부인이고, 남편이 사장이면 여자는 사장부인이었다. 따라서 여자는 남자를 내조함을 통해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삶을 살았다. 그런데 자기가 아무리 내조를 잘 해도 남자가 형편없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노력이 모두 허사가 되어 버리고 만다.

 

이것은 운동선수와 코치의 관계와 같다. 코치가 아무리 열심히 가르치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도 운동선수가 게으르고 노력하는 자세가 없다면 코치의 모든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래서 코치는 좋은 선수를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래서인지 여자는 체질적으로 게으른 남자를 싫어한다. 성취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없는 남자, 집에서 잠만 자는 남자를 증오한다. 왜 책 제목 중에 여자는 졸고 있는 남자를 증오한다라는 책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여자는 자식이 떠난 후, 남편에게서도 어떤 희망을 찾지 못하자.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게 된다. 적어도 자신의 여자로서의 인생을 모두 허비하게 한 한심한 남편과는 더 이상 일 분도 함께 살고 싶지 않다.

 

그에 비해 남성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직장에 쏟아 부었으나 직장과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음에 대한 분노심을 갖고 있다.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직장에서 얼마나 큰 희생을 치뤘는데, 가족들은 전혀 이해해 주지 않는다. 자신 덕분에 새 아파트도 사고 새 옷도 사고 굶어죽지 않고 먹고 살았는데 가정내에서 자신의 기능은 현금인출기였을 뿐 아버지로서의 자리는 없었다. 사실 지나온 세월 철저히 직장에서 생존하고 살아남기 위해 회사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과묵함과 지시하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모든 인간관계가 딱딱한 회사어로 지시하는 삶이었다. 따뜻하고 살갑게 대하는 가정의 언어는 잃어버린지 오래다.

 

그런데 이젠 갈 곳이 없다. 직책이 사라짐과 함께 기존의 인맥들도 다 사라지고, 마지막 남은 인생, 그동안 아내와 함께 해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 남은 시간만큼은 아내와 모든 것을 함께 하려 하는데 아내는 늘 바쁘다고 피해다니기만 한다.

 

자녀들도 자신을 피하기만 한다. 아내와 자식들이 함께 있을 땐 즐거운 대화의 꽃이 피어나는 것 같은데 자신이 들어오면 대화가 끝나고 모두 자기방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자식들이 결혼 이후 떠나고 나자 부쩍 집이 조용하고 한가해 졌다. ... 그러던 어느날 아내가 이혼서류를 내민다. 남자로서는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이 예전과 다르게 이혼을 쉽게 받아들이게 된 것은 이혼에 대한 사회적 관용 분위기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예전에는 이혼녀는 주홍글씨에 나오는 여자처럼 도덕적 불결함의 대상이었다. 팔자가 쎈 여자, 남편 잡아먹는 여자라는 손가락질을 당해야 했다. 이혼한 가정의 자녀 역시 정상적인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편부, 편모 슬하의 자녀는 사회적으로 많은 불이익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적으로 이혼이 매우 광범위한 현상이 되었고, 개인의 행복을 위해 이혼은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지금은 이혼남녀, 돌싱, 날싱, 모두 그 자체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이다.

 

여기에 여성이 이혼을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실이 있다. 여성의 경제적 독립이 가능하도록 사회적 법적 제도가 완충된 점이다. 옛날에는 이혼하면 얼마 되지 않는 위자료 밖에 없었다. 그 시대에는 그것도 대단한 것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수준에서 돌아보면 위자료는 극히 적은 보상금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금은 혼인 기간 동안의 가사 노동을 정당한 노동으로 인정받고, 재산 형성기의 여성의 역할을 인정하여 재산분할청구를 할 수 있으며 차후 수령하게 되는 연금에 대해서도 연금분할을 청구할 수 있다. 절반의 재산을 청구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이제 여성은 극도의 경제적 궁핍이 두려워 억지로 남성의 통제 아래 살아가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빈손이 아닌 나름 넉넉한 재산을 기반으로 인생의 후반전을 출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황혼이혼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금처럼 이혼을 자연스런 시대 흐름이라고 보며 팔짱끼며 보고 있어야 할 것인가?

 

 

아니다. 부부 두 사람은 인생의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리는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한 생애를 통해 함께 공유했던 기쁨의 시간들이 있었고 아픔을 서로 나누었던 시간들이 있었다. 어느 누가 아들 돌 사진을 함께 보며 그날의 기쁨을 동일하게 공감할 수 있겠는가? 누가 첫 아파트를 장만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던 순간의 감회를 남편처럼 함께 공감할 수 있겠는가?

 

지금 내 인생을 도둑질해 간 강도처럼 보이는 이 사람이 사실 나의 역사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물이다. 그 인물을 인생에서 지워버리면 자신의 인생에서 사라지는 분량이 너무 크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서로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그에 앞서 지나온 삶, 상대방의 지나온 삶이 결고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서로 증인이 되어 주어야 한다.

 

남편은 그 아내가 자식을 위해 얼마니 많은 희생을 치뤘는지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아내가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빈둥지증후군으로 괴로워 할 때 자식을 저렇게 사람으로 키워준 건 당신이야라고 인정해 준다면 아내는 큰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리고 아내가 폐경을 맞아 여성성이 사라진 것을 고통스러워할 때 여성이 과거에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는지를 증명해줄 수 있는 증인으로 여성의 폐경을 함께 아파해 준다면 여성 역시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내 역시 남편이 얼마나 가족들을 위해 희생해 왔고 직장에서 헌신해 왔는지 아는 증인으로서 남편을 위로해 주고 남편의 지나온 삶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아내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누가 남편의 고독을 알겠는가?

 

이렇게 서로가 상실감에 젖어 있는 부분에 대해 서로가 의미 있는 삶이었다는 것을 서로 인정해 준다면 두 부부는 꼭 남녀로서가 아닌 인생의 동지이자 친구로서 한 평생을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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